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이집트 (문단 편집) == 흥미로운 이야기들 == * 현재까지 수십 구에 달하는 [[파라오]]들의 미라가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고 귀족과 평민들의 것까지 다 합치면 그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런데 개중 가장 '''끔찍하게 죽은 파라오의 미라'''가 있으니 바로 '세케넨레 타오'의 미라다. [[이집트 제2중간기]]의 제17왕조 시대의 파라오로, 힉소스인들과 싸우다가 전장에서 5명의 장정들에게 칼과 도끼로 난자당해서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시신은 간신히 수습했지만 정말 보기 힘들 정도로 난도질당한 상태였고, 상태가 너무 안좋아서 미라화 작업도 정상적으로 하지 못했다.[* 아래에 나오는 그의 미라를 보면 미라임을 감안해도 정말로 상태가 좋지 못한데 일단 머리에 구멍이 뚫려있는 상태에다가 한쪽눈은 칼로 깊게 긁힌게 보이는데다가 코는 아에 잘려나간 상태다.]때문에 [[카이로 박물관]]에서 전시를 하자 미라에서 나는 썩은 시취로 관람객들이 놀라 도망칠 정도였다고 한다. 워낙 보기에 흉악한 모습이라 영화 [[미이라 시리즈]]의 주인공 [[이모텝]]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folding 혐오감을 줄 수 있으니 열람시 주의 [펼치기ㆍ접기] [[파일:seqenenretaomummy.jpg|height=300]] [[파일:Sequenre_tao.jpg|height=300]] }}} * 더 많은 파라오들의 미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파라오/미라]] 문서 참조. * [[람세스 2세]]의 미라는 1881년 발견된 이후 [[카이로]]로 이송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관원이 [[미라]]에 적절한 분류를 찾지 못해 '''[[건어물]]'''로 취급되는 굴욕(...)을 겪었다. 이후 1976년에 그의 미라에 곰팡이가 피자 이집트 정부는 [[프랑스]]에 보존 처리를 맡겨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프랑스 법률상 시신을 들여오기 위해서는 그 미라의 친인척이나 가족이 동행해야 했다는 것. 람세스 2세의 친인척이 남아 있을 리가 없으니 결국 이집트 측에서는 '''람세스 2세에게 [[여권]]을 발급해 그의 신원을 보장했다.''' 이 여권은 세계에서 가장 옛날 사람에게 발급된 여권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프랑스 당국은 국가원수 격식을 갖추어 람세스 2세의 미라를 맞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람세스 2세 미라의 머리카락과 옷 조각을 몰래 슬쩍하기도 했다.][* 참고로 인터넷에서 '람세스 2세의 여권'이라고 공개된 사진은 실제 여권 사진이 아니다. 람세스 2세의 실제 여권은 공개된 적이 없다.] * 이집트인들은 [[고양이]]를 신성시했다. 그래서 집안의 고양이가 죽으면 고양이를 애도한다는 이유로 집안 사람들 전체가 [[눈썹]]을 밀어버리고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 현대 [[이집트]]는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 덕분에 바가지와 사기꾼 천지라는 악명을 떨치고 있는데, 사실 이건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유구한(...) 전통이다. 로마인들도 이집트의 바가지가 지나치다고 불평했고 한 로마인은 [[왕가의 계곡]]을 방문한 뒤 '석관 빼고 모든 게 마음에 안든다'라는 불만섞인 평가를 [[낙서]]로 남기고 갔다. * 이집트인들도 [[치약]]을 썼다. 황소의 발굽, 재, 탄 달걀 껍질, 부석에서 추출한 분말 따위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susennes-Gold-Mask-Side-View.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mendes-d2e61be0-d6fd-423f-acb5-7731fdddea2-resize-750.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umblr_7d5e9fb2f151cae7063d24433730a175_aaf97021_500.jpg|height=300]]}}} || || '''{{{#A0522D [[프수센네스 1세|{{{#A0522D 프수센네스 1세}}}]]의 마스크[* [[투탕카멘의 가면]]보다 확연히 세공의 질이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다.]}}}''' || '''{{{#A0522D [[아메네모페|{{{#A0522D 아메네모페}}}]]의 마스크}}}''' || '''{{{#A0522D [[프수센네스 1세|{{{#A0522D 프수센네스 1세}}}]]의 은관}}}''' || * 보통 [[파라오]]의 무덤하면 [[투탕카멘의 무덤]]만 유명하지만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도 존재한다. 이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파라오의 무덤 중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이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고대에 소규모로 털린 적이 있지만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단 한번도 도굴당한 적이 없다. 하지만 부장품의 양이 투탕카멘의 무덤에 비해 적고,[* 프수센네스 1세는 혼란기인 [[이집트 제3중간기|제3중간기]] 시대의 파라오다. 투탕카멘이 아무리 별볼일없는 파라오라지만 이집트 최고 전성기인 신왕국을 다스렸던 파라오였기에 혼란기 시대의 웬만한 파라오를 압도하는 보물들과 함께 묻혔다.] 결정적으로 발견 시기가 하필이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인 1939년이라서 조용히 묻혔다. * 기원전 12세기 무렵인 [[람세스 3세]] 시절에는 세계 최초의 '''노동자 [[파업]]'''이 벌어지기도 했다. 왕가의 신전을 짓던 노동자들이 봉급으로 받는 빵의 배급이 지연되자 신전에 드러누워서 파업한 것. 이는 람세스 3세가 봉급을 바로 지급해주겠다고 약속하며 해결되었다. [[https://libcom.org/article/records-strike-egypt-under-ramses-iii-c1157bce|#]] * 고대 이집트인들은 보통 40세 이상을 살지 못했다. 현재 기준으로도 오래 살았다 할 수 있는 90세 이상을 살다간 [[람세스 2세]]가 얼마나 장수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 고대 이집트인들은 [[저글링]]을 묘사한 세계 최초의 민족이다. * 고대 이집트의 미라에서 [[코카인]], [[니코틴]] 등 아메리카 대륙에서 기원한 [[마약]] 성분이 추출된 것을 두고 '고대 이집트가 아메리카와 교역한 증거다!'라는 설이 퍼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고대 이집트가 아메리카 대륙과 교역을 했을 가능성은 '''없다.'''[* 이집트의 항해술은 [[대서양]]은커녕 연안항해에 머물러 있었다. 이집트의 배는 대부분이 그저 [[나일강]]을 항해하기 위한 용도에 그쳤으며 대양을 횡단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력은 아예 없었다.] 현재 학계는 미라에서 나온 마약 성분이 후대에 오염된 것이거나, 이집트에 [[니코틴]]이 함유된 다른 식물들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본다. 마약 성분이 검출된 시기에는 [[니코틴]]이 아메리카에만 자생하는 코카나무, [[담배]] 잎에만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니코틴이나 코카인은 구대륙에서 자생하는 겨울체리나 [[셀러리]] 류에서도 발견되는 성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코카인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이 굳이 아메리카 대륙과 교역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gyptian-ostrocon-tablet-attendance-2.jpg|width=400]]}}} || || '''기원전 1250년 경의 노동자 결근 사유를 적어놓은 문서.[* 검은색과 적색 잉크로 써놓았다.]''' || * 기원전 1250년 경[* 더 자세히 말하면 람세스 2세 재위 30주년 겨울의 네 번째 달 24일이다.] '오스트라콘'이라 불리는 백색 석회암 파편에는 40여 명에 달하는 고대 이집트 노동자들의 결근 사유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페누브'라는 남자는 어머니가 아파서 출근하지 못했고 '후이네페르'는 눈이 아파서 못나왔으며 누구는 [[전갈]]에 물려서, 누구는 병에 걸려서, 일부는 [[맥주]]를 만드느라 시간이 없어서 일에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아내]]나 [[딸]]이 '피를 흘려서' 나오지 못한다는 사유도 있는데 이는 [[월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월경을 하느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도 충분히 결근 사유가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 * [[이집트 상형문자]]를 읽는 방향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글을 읽는 방향은 서기가 쓰는 마음대로라서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심지어 아래에서 위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예 방향이 뒤죽박죽이라면 해석 자체가 안될테니 일부러 단서를 남겼는데, 그게 바로 문자 옆에 그려놓은 그림들이다. 인물, 동물 등이 바라보는 방향이 곧 글을 읽는 방향이었다. 예를 들어 문자 옆에 한 남성이 왼쪽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서있는 모습이 그려졌다면 그 문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 된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은 스스로가 사는 땅을 '이집트(Egypt)'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집트'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멤피스]]에 있는 [[프타]] 신의 사원 'ḥwt-kꜣ-ptḥ' 즉 '프타의 카를 모시는 사원'을 그리스식으로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가 멤피스를 가리키는 단어로 확장되었고, 이게 더 나아가 이집트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변하면서 현대인들 대부분이 '이집트'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스스로가 사는 [[나일 강]] 유역의 땅을 '검은 땅' 즉 '케메트(km t)'라고 불렀다. * 고왕국 시대의 파라오 [[페피 2세]]는 [[파리(곤충)|파리]]가 주변에서 윙윙대며 날라다니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래서 일부러 벌거벗은 노예 몇 명에게 [[꿀]]을 발라 항상 주위에 데리고 다녔다. 파리가 그에게 꼬이지 말고 꿀을 바른 노예 쪽으로 가라는 뜻이었다고. * [[투탕카멘]], [[람세스 2세]] 등과 함께 가장 유명한 파라오들 중 하나로 꼽히는 [[클레오파트라 7세]]는 순혈 이집트인이 아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피부색이 어두운 고대 이집트인들보다는 오히려 그리스계 백인종에 훨씬 더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면 추정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시신이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 하지만 클레오파트라 7세로 추정되는 초상화 대부분이나 그녀의 모습이 새겨진 것이 확실한 당시 동전에서 그녀는 그리스인의 외모로 묘사되며, 왕조 자체가 그리스 계였기 때문에 그리스인의 외모에 가까웠을 것이란게 합리적인 추측이다. 확실한 것은 일부 후대인들의 주장처럼 흑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시 이집트에는 흑인 왕조인 25왕조도 있었지만 멸망시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는 350년 차이가 난다. 25왕조는 누비아가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시작된 왕조이며 이후 이집트에서 밀려나 누비아로 돌아갔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인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다. 이집트인들은 흑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아시아인을 모두 다르게 그렸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 시기의 여성 파라오을 그린 모습(즉 그녀로 추정되는 모습)은 모두 그리스인이거나 이집트인처럼 그려져있다. 100% 확실한 건 그녀가 그리스인의 후손이란 점이며, 당대에 (동전으로 볼 수 있듯) 그리스인으로 묘사되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문명은 그리스계 왕조이며, 당시 이집트 사회의 주류사회이던 이집트인은 우리가 흑인이라 부르는 인종적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아프리카에 산다고 다 흑인이 아니란 것)] 클레오파트라가 살았던 시대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리스계 왕조였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 사이의 인종적 벽을 꽤나 엄격히 구분했기에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이 서로 섞이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이 때문에 300년에 걸친 이집트 통치 와중에도 그리스계 혈통이 왕가에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내려왔던 것. 그래서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족들 중 고대 이집트어를 구사할 줄 아는 몇 안되는 위인들 중 하나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riends-of-Khufu.jpg|width=400]]}}} ||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새겨진 고대 일꾼들의 낙서. '쿠푸의 친구들'이라는 익살스러운 내용이다. * 고대 노동자들도 [[낙서]]와 [[그래피티]]를 즐겼다. 가장 대표적인 낙서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남긴 낙서인데, 당시 일꾼들이 피라미드를 짓다가 중간 석재에 적은 '쿠푸의 친구들', 혹은 '멘카우레의 술주정뱅이들' 같은 낙서들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파라오]]의 무덤에도 이런 낙서를 했을 정도였으니 웬만한 귀족이나 호사가들의 묘지에도 꼭 몇 개씩은 몰래 남겨놓은 낙서들이 남아 있다. 이후에도 [[로마 시대]]와 근대, 심지어 현대까지도 관광객들이 유적을 방문한 후 'XX 왔다 감' 식으로 낙서를 워낙 많이 남겨놓았기에 유적에 대한 낙서는 현재진행형이다. * [[파라오]]들은 극도로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움직이지도 않고 시중을 받으며 [[꿀]], [[과자]], [[케이크]] 따위만 먹어댔으니, 그 탓에 유난히 [[비만]]이나 [[과체중]], [[충치]], 온갖 성인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다. 벽화에서는 날씬한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로 미라를 부검한 결과 심각한 비만을 앓고 있었고 살이 엄청나게 쪄있는 심각한 상태였다고. 그 유명한 [[람세스 2세]] 역시 노년기에 들어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면서 살았다. * 고대 이집트인들은 무려 2,000여 명에 달하는 신들을 믿었다. * 고대 이집트 의사들은 분업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보통 고대의 의사들은 모든 종류의 병들을 맡아 진료했지만, 의술이 발달한 고대 이집트였다 보니 나름대로 분업이 이루어졌던 것. 기원전 450년 이집트를 여행한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의학을 논하며 '모든 의사들은 한 가지 질병만을 치료한다... 일부는 눈만을, 일부는 이빨만을, 일부는 배만을 치료하는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의사들이 진료하는 부위에 따라 이름을 따로 붙이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치과의는 '이빨들의 의사', 항문외과의는 '항문의 양치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offin-visage-akhenaten.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7dfa35c06ee456788d68451c8a9e0a5.jpg|height=300]]}}} || |||| '''{{{#A0522D [[아케나톤|{{{#A0522D 아케나톤}}}]]의 황금관}}}''' |||| * 보통 이단자 파라오 [[아케나톤]]의 부장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놀랍게도 '''아케나톤의 황금 관'''이 보존되어있다. 사실 아케나톤의 것이라고 정확한 판정이 나온 것은 아니나 일단 그 양식과 화려함이 [[파라오]]의 것임은 확실하고, 아케나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KV55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학계에서는 아케나톤의 관이라고 거의 확실시하고 있다.[* 특히 황금관 안쪽의 카르투슈까지 싹싹 긁어내진 것으로 보아 더욱 아케나톤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단순한 도굴꾼이었으면 그냥 관 자체를 털어가 녹여버렸지, 굳이 이름까지 번거롭게 파낸 다음 방치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투탕카멘]]의 관처럼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아니다. 아케나톤 사후 사제들이 그를 [[기록말살형]]에 처하며 그의 무덤을 파헤쳤고 이때 그의 관이 심각하게 훼손당했다. 관의 얼굴 부분은 오른 눈썹 주위를 제외하면 아예 날아갔으며, 관 전체가 아닌 관뚜껑만이 남아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94d06dc-1b8c-41d8-a56a-849fb077c401.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938adde6de046bfab2a38cacca3cbb7.jpg|height=300]]}}} || |||| '''{{{#A0522D [[람세스 2세|{{{#A0522D 람세스 2세}}}]]의 목관}}}''' |||| * '''[[람세스 2세]]의 목관'''이다. 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람세스 2세 본인을 위해 만들어진 관은 전혀 아니다. 그가 원래 쓰던 황금 관은 엄청나게 화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람세스 2세의 무덤]]은 이미 매장 후 수십년도 안되어 도굴당했고, 미라가 원래 묻혀있던 황금관 역시 도굴꾼들에게 탈탈 털려나갔다. 무덤 내부가 폭탄맞은 것처럼 뒤집어진 걸 보고 기겁한 사제들은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재수습한 다음 [[데이르 엘 바하리]]에 재안장했는데, 이때 신원미상의 파라오가 쓰던 목관을 재활용했다. 즉 처음부터 람세스 2세를 위해 짠 관이 아니라 어느 불쌍한 파라오의 목관을 빼와서 거기다가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안치한 것.[* 사실 이 목관 역시 투탕카멘의 관처럼 예전에는 금박과 보석들로 상감되어 있었다. 하지만 파라오들이 선대 파라오들의 관을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이 관에 덮여있던 귀금속들도 죄다 벗겨진 걸로 추정된다. 이 관은 대략 제18왕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얼굴을 보면 아마 [[호렘헤브]]의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학자들도 있다.] 람세스 2세의 미라는 1871년에 다시 발견되기까지 약 3,000년 간 이 목관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수많은 보물들이 쏟아져나왔는데, 개중 가장 이목을 끈 유물들 중 하나가 바로 [[투탕카멘의 단검]]이다. 그 이유는 '''[[운석]]으로 제련한 단검'''이기 때문. 자세한 내용은 [[투탕카멘의 단검]] 문서 참조. * [[투탕카멘의 저주]]는 사실상 근거없는 미신이다. 애초에 무덤의 발굴자인 [[하워드 카터]]부터가 무덤을 발굴하고 무려 17년을 더 살고 64세에 죽었다. 문서만 들어가봐도 알겠지만 무덤 발굴에 참여한 1,500여 명의 인원 가운데 고작 '''21명'''만이 얼마 안가서 사망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저주설은 오컬트에 심취해있던 당시 유럽 사교계가 허무맹랑한 낭설을 지나치게 부풀린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무덤 입구에 '왕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와 같은 저주성 문구도 전혀 새겨져 있지 않았으며 저주와 관련된 대부분의 스토리들은 그냥 끼워맞추기 확대해석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